남편 정재현 후회록

* 본 글은 트리거 소재가 포함 되어있습니다. 과거, 윤오와 사진을 찍었던 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둘러본 장소는 과거와 똑같은 풍경과 세월을 자랑했다. 여긴 변함없구나. 정재현도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까. 과거의 청취 때문인지, 나와 단둘이 있어서인지 윤오는 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손가락으로 카메라를 만들었다. 정윤오가 만든 조그...

Our love is six feet under. I can't help but wonder If our grave was watered by the rain Would roses bloom? 우리 사랑은 죽어버렸어. 그래도 우리 무덤에 비가 내린다면 장미가 필 수 있을까? 등산화를 신다 말고 있을 리 없는 재현의 사진을 쥔 것처럼 허공을 잡고 지그시 바라...

*정우 이야기인 "아기씨 다홍 아기씨" 를 먼저 읽고 오셔야 제일 하단의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지옥에 빠진 죄인처럼 울부짖었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살려달라 빌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죄는 생각보다 크다. 신도 감히 용서할 수 없을, 죄였다. 불타는 세상에 떨어진 죄인이 할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벽을 기는 것뿐이다. 살고...

원망이 쉬우면 쉬울수록 후회 또한 짙어진다. 왜라는 질문을 하기 전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야 했다. 분명 완벽한 삼각형일 때가 있었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을 그림을 완성했던 적도 있었다. 누구의 잘못이라 칭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더러워진 손가락으로 사진 한 장을 계속해 쓰다듬었다. 의미가 있나. 부드럽게 오려 붙인 사진에 의미가 있던가. 밤늦게까지 돌...

죽음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꿈을 꿨다. 모든 게 찬란했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었다. 셋 모두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시기였다. 누구 하나에게 마음이 치우치지 않았던 가장 이상적이던 시절, 모두가 웃었다. 밝게 웃는 세 얼굴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구나. 입안으로 쓴 과일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 텁텁하고 씁쓸해 뱉...

뜻 모를 말을 남겨두고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아니. 다 알잖아. 사실 다 알고 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나 외면할 뿐이다. 둘 중 하나. 둘 중 하나. 재현은 같은 말을 계속해 중얼거리며 헛헛한 웃음을 보였다. 질문의 의도가 뻔했다. 누구도 고르지 못할 걸 알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냈다...

거울 속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던 재현은 비소를 머금었다. 고작 몇 주 만에 이런 꼴이다. 푸석해진 피부와 퀭한 눈 밑, 까슬하게 올라온 입술. 고작 몇 주 만에. 다 죽어가는 행색을 보아하니 우습다. 어리석게도 김여주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우습기 그지없다. 살 수 있다고. 살 수 있었다고. 물기 젖은 얼굴을 쥔 채 킥킥 웃으며 볼품없이 주저...

살다 보면 기억하지 못할 시간도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대개 그런 기억은 끔찍하고 혹독한 사막과 같다. 잡히지 않을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허덕이다 끝끝내 모래언덕에서 말라 죽어버린 과거. 누굴 탓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아 활활 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게 다인 기억. 그러나 어딘가 교묘한 구석이 있다.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는 기억의 조...

비가 오던 날이었다. 천둥과 번개가 비와 함께 몰아치던 날이었다. 아, 그래. 그런 날이었다. 담요를 끌어 네 어깨를 포근히 덮었다. 그래. 여주야. 그런 날이었지. 비가 오는 날이면 넌 신발을 바꿔신곤 했다. 가벼운 재질의 운동화가 물에 푹 젖는 게 싫다, 얼굴을 구겼다. 널 위해 준비한 검은 장화 하나가 여전히 신발장에 있었다. 몇 번 신질 못했다. 그...

신은 내게 벌을 내리고 있었다. 홀로서는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도 외로운 어둠이었다. 눈을 떠도 빛은 단 한 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네가 눈을 떴을 리 없었다. 전화를 받고 급하게 도착했지만 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두 손을 아랫배 위에 곱게 포개곤 철저하게 절망 할 ...

재현은 말라버린 동생을 감흥없이 내려다 봤다. 아마 여주와 윤오는 모르겠지만 재현은 이미 병원 내에서 유명인사가 된지 오래였다. 동생과 아내가 같은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었으니까. 의사와 간호사들이 쉬쉬한다지만 재현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년 전에 동생이 그러더니 이번엔 아내가 그러네. 모두가 재현을 보고 손가락질 했다. 불쌍해서 어떡해. 혹시 ...

그 날 밤 여주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여주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재현을 간호사들이 어렵사리 떼어냈다. 재현은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여주를 데려가지 마. 정윤오, 여주는 안 돼. 여주야, 여주야. 눈물 젖은 외침에도 여주는 떠나고 있었다. 재현의 외침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미동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 허망했다. 이렇게 갈 애가 아니었다. 이렇게 ...